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이 말은 다른사람들의 말을 신경쓴다는말 아닌가?
뭐 그래도 조심하는게 좋으니 됐지
그들이 우리를 경멸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특별한 악의 없이 경멸허게 될수 있다
악의 없는 경멸? ㅇㄹ
오이디퓨스 왕 비극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도 중요한 존재라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수있다
ㅋㅋ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시연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때문이다.
정리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지위란)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더 중요하다.
사실 지위는 사람들이 더 노력하게 만드는 동기가 됩니다. 자신이 선망하는 어떤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발전하게 됩니다.
높은 지위를 갖게 되면 돈, 명성,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목표 이면에 공통되는 것이 있어요. 세상으로부터 존중받고 싶은 욕망입니다. 높은 지위를 가지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 받을 수 있죠.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귀를 기울여 관심을 가져주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사랑결핍이 불안의 1차적인 내적 조건이라면 속물근성은 불안의 1차적 외적조건이라 할 수 있어요.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한다는 건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는 걸 의미해요.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 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 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속물들이 아첨할 때 사용하는 전략이에요. 가령 부자에게 아첨을 하는 속물이 있다고 해 봐요. 그 속물은 부자에게 "당신이 부자라 돈이 많아 관심을 가진다."고 하지 않아요. 부자에게 돈 때문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분 나쁜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속물은 다른 이유를 갖다 붙여요. "선생님은 부자인데도 어쩜 그렇게 소탈하실까요? 그 소탈함에 반했어요."라는 식이죠. 속으로는 부자이기 때문에 접근하는 건데, 그걸 굳이 다른 이유 때문인 걸로 꾸미려하죠.
왜 그럴까요? 그건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속물들의 조건적인 관심이나 사랑과 달리 무조건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아보았기 때문이죠. 부모가 자식을 조건이나 지위 때문에 사랑하진 않잖아요.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어릴 때 누구나 경험하죠. 그래서 그런 조건없는 사랑의 얼마나 좋은 것인지 잘 알고 있죠. 그리고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욕구합니다. 속물은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욕구를 이용하는 겁니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야심을 못마땅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이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인양 쫓아다니게 된다.
그런 행동은 두려움에서, 존엄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경멸하기보다는 슬퍼하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부나 존중에 대한 만족감은 (1)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2)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며 결정되는 거죠.
우리는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귀족 계급의 지원을 받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사회는 그 참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맛보기 어려운 몇 가지 행복을 누렸다. 민중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신분 외에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갔지만 반감을 품지도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고난이라고 생각했다. 농노는 자신의 열등한 위치가 불변의 자연 질서의 결과라고 여겼다. 그 결과 운을 불평등하게 타고난 여러 계급 사이에 일종의 친선 관계가 확립되었다.
사회는 불평등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세기 초부터 이런 종교에 기반한 신념 혹은 현세에 대한 염세주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생겼죠. 낮은 신분, 가난한 가정에서 자수성가한 영웅들의 자서전이 서점에서 많이 팔리기 시작했죠.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 아마 이런 장르의 효시일거에요. 이후 비슷한 성공담, 출세담이 쏟아져 나왔어요. 여기에 『보그』와 같은 잡지들에는 명품 광고와 부자, 유명인들이 살고 있는 집, 가지고 있는 물건 등에 대한 정보가 대중에게 소개됩니다.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정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죠.
서양 근대 이전 사회는 농민, 성직자, 귀족의 3계급이 존재했어요. 이들 3계급은 상호의존 관계라고 생각했죠. 농민들이 가난하게 살긴 했지만, 성직자와 귀족은 농민이 없으면 자신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다는 생각에 농민을 존중했어요.
그런데 그들이 돈을 모으고, 많은 물건을 소비하는 건 결과적으로 사회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들로 인해 사회의 부가 축적되고, 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거죠. 어찌 보면 요즘 말하는 '낙수효과'와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능력주의 사회의 이상 덕분에 다수가 자신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수백 년 동안 부동의 계급 제도 내에 억눌려 있던 재능 있고 똑똑한 개인들이 이제 전체적으로 평평해진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재능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출신, 성별, 인종, 연령은 개인의 발전에서 넘을 수 없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보상의 분배에 마침내 정의의 요소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경제적 능력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불운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었다. 따라서 빈자들은 이제 부자들의 자선과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자수성가한 강건한 개인들의 눈에는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 질서에 따라 사회는 병약하고, 저능하고, 느리고, 우유부단하고, 신의 없는 구성원을 끊임없이 배설하고 있다. 그들이 살 만큼 완전하다면 살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사는 것이 좋은 일이다. 만일 그들이 살 만큼 완전하지 않다면 죽을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죽는 것이 최선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보면 게으르거나, 낭비벽이 심하거나,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일거라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결투는 사실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의 일환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자존심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했죠. 쉽게 말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맡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잘못된 자존심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법 중 하나가 철학이에요.
철학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누군가 멍청이라고 깔보거나 훌륭한 인격자라고 추켜 세울 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성이라는 상자에 넣어서 그런 평가가 타당한 것인가를 따져보는 사람들이 철학자들이란거죠.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이렇듯 세상의 평가는 변덕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나의 본 모습을 잘 모르고 오해한 바를 바탕으로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거죠. 그런 변덕스러운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바로 철학자라 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쇼펜하우어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나 자신의 행복을 맡길 수 없다고 말한 거에요. 변덕스럽고 오해이기 쉽상인 타인과 세상의 평가에 초연하라는 의미인거죠.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존중받을 수 없는 현실은 바뀌지 않아요. 달라지는 게 없는 데 나만 정신승리하는 것 아닌가요?
알랭 드 보통은 이럴 때 '지적인 염세주의'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해요.
냉소주의자들은 사실 바로 지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욕구는 더 큰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을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해요.
냉소주의자들은 단지 불편할 정도로 기준이 높은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눈을 좀 돌려볼 필요가 있어요. 근대 사회에서 예술은 부르지아 계급의 거들먹거리고 잘난 척 하기 위한 수단이 된 측면이 있어요. 그건 예술 소비의 측면이었죠. 그런데 그런 예술을 생산한 예술가들은 어땠나요? 대개 가난한 예술가, 불행한 예술가들인 경우가 많았죠. 자신 속에 끓어오르는 어떤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르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죠. 그런 과정에서 자기 행복과 안위 따윈 내팽개쳐버리는 광인의 이미지가 예술가들의 이미지 아닌가요?
그럼 그들 예술가들이 표현하고 싶었던 게 뭘까요?
소설, 시, 희곡, 회화, 영화 등 예술 작품은 은근히 또 재미있게,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주는 매체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만약 누군가의 실패나 실수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걸 기자가 신문기사로 실었다면 어떨까요? 결과만 부각시킬 거에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각해서 그 기사를 보는 사람들이 비난하게 만들겠죠. 사건 당사자는 철저하게 대상이 되고, 독자들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입장으로 선명하게 나눠지죠. 뭐 이게 신문만 그렇겠어요? 어떤 사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뒷담화도 그렇죠.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말의 심판대에 오르죠.
그런데 비극적인 소설은 실패자와 패배자를 그렇게 다루지 않아요. 소설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그들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죠. "나라도 저 상황이었으면 저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말이죠.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만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다가 권위에 대한 불만 토로가 적절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 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상태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또, 나처럼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어떤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항상 달라졌어요. 정치란 "여러 집단이 이전 체제에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이익을 보던 사람들과 벌이는 투쟁"이에요
좋습니다. 사회적 지위라는 게 그 시대마다 가진 사회적 이상에 의해 결정된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사회적 이상이란 게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말도 이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정치'가 불안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 정리해 주세요.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이반은 이제 살 날이 몇 주 안 남은 상태에서 자신이 지상에서 얻은 시간을 낭비했고, 겉으로는 품위가 있지만 속으로는 황폐한 삶을 살았음을 인식한다. 그는 자신의 성장, 교육, 일을 돌이켜보며, 다른 사람들 눈에 중요해 보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삶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자신의 이익과 감수성을 희생해왔는데, 이제야 그들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잊히고 무시당하는 존재라 하더라도,다른 사람이 아무리 강하고 존경받는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결국은 가장 민주적인 물질, 즉 먼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누가 우리보다 몇 밀리미터 더 큰가 하는 관심은 우리보다 10억배 큰 것들, 우리가 감동을 받아 무한, 영원, 또는 단순하게 또 어쩌면 가장 유용하게 신이라 부르기도 하는 힘에 대한 경외감에 밀려나게 된다.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란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네요.
기독교인들은 두 개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천국과 지상이죠. 이 두 도시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는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부자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반대가 될 수 있죠. 심지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의 형벌에 빠져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위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했다. 가난이 선과 공존할 수 있고, 초라한 직업이 고귀한 영혼과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보헤미아'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발견된 새로운 집단입니다. 사실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서 규정하기엔 너무나 다양합니다. 추구하는 가치관도 다양하고, 거주지역, 직업, 인종 등도 아주 다양합니
이런 보헤미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입니다. 소로우는 월든 호수를 찾아 오두막을 짓고 '소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불안은 내가 지금 가진 지위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부자, 권력을 쥔 사람, 철학자, 기독교인, 예술가 등 아주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이들 중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면 불안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누구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느냐죠.
사실 답은 내게 있습니다. 내가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서로 다른 가치의 위계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이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다른 지위의 위계를 비판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고 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